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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가능하다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401
누구나 알고 있는 말 가운데
뭐 눈에는 뭐밖에 안본인다는 말과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위 두 마디는
사물을 장님이 코끼리만지듯이 하면 안된다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아래에는
좀 긴 글인
'=아래1='과
'=아래2='가 있습니다.

'=아래2='의 내용은
어느 님이
서양문명이 동양문명을 위에 있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아래1='은
'=아래2='을 비판한 것이니(아래1과 아래2는 'www.changbi.com'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아래2='와 '=아래1='를 읽어 보시고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라는 말을 새기며
한글날을 국경일로 하도록 하면서
세계공용어를 영어로 할 것이 아니라
한글이 세계공용어가 되도록 하여 세계평화가 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래1='를 보면
'8. 미국사회는 이제 서서히 교조주의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악의 축'이라는 깃발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와 같이
영어를 쓰면 미국은 교조주의로 빠지고 있기에
영어가 세계공용화가 되면 세계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지만
우리의 교육목표가 '홍익인간'이고
한글은 배우기 쉽기 때문에
한글이 세계공용어가 되면 세계평화가 이루어질 있기 때문이다.


=아래1=


글은 잘 읽었습니다.

님의 글의 목적은 '이성과 과학적 사고에 바탕을 둔 현실이해'정도라고 보여지는군요.
그래서 님의 글에서 대략 다음과 같은 입장이 감지됩니다.
1. 니체나 러셀과 같은 사상가들의 견해에 동의.
2. 이성과 과학적 사고에 대한 예찬.
3. 동양적 사고를 비교 열위로 함.
4. 노장 사상과 유교 사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
5. 민주주의 예찬

1. 유럽문명에 대해 일부 사상가들의 견해에 지나치게 의존한 듯합니다.
니체와 러셀은 대체적으로 그 사상의 바탕이
서구 기독교의 비이성적 풍토를 비판한 데서 출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럽도
동양과 마찬가지로 황당한 초월적 개념 속에서 꿈꾸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 것을 보게 되면 그림이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여기에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잣대가 필요하게 되겠지만,
무엇보다 우리 것은
우리가 가장 친숙하고 잘 알고 있다는 것이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래서 오만한 유럽인들(아직도 일부 잔존하는)에게
설득력 있게 우리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시켜야 하는 것이 이 땅의 지성인들의 몫입니다.

3. 도올이
마루야마 마사오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만,
무릎을 꿇은 것은 도올 개인이지 이 땅의 모든 지성인들은 아니듯이,
니체 러셀 기타 유명한 서양 사상가들이 많지만
우리가 그들을 무비판적으로 신봉하고 그들에게 무릎을 꿇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
숨쉬었던 사상가들 중에는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분들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4. 우리는 서양사상가들에게서 유럽 문명에 대한 이해를 넓히면 족합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유럽문명에 정통하다고
동양에 대한 이해 수준에도 정통하다고 보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닐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사고체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여러 텍스트에서
자신들의 기호에 맞는 귀절들이나 현상들을 선택하여 침소봉대하게 마련입니다.
그들의 견해를 비판하기 위하여는 우리가 우리 것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5. 불교 유교 도교도 근본을 들여다보면 꽤 합리적인 점이 많습니다.
현대물리학의 여러 개념들,
양자역학, 카오스와 복잡계이론 등
모두 자연 현상에서 찾아지는 개념들이고,
이것이 인간과 사회에도 적용이 되고 있는데 도교 불교와 상통하는 점도 많습니다.


6. 작금의 우리 사회는
서양 철학이나 과학 못지 않게
유교적 공동체윤리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우리 것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는 이제 이성적 삶 중심에서
감성적 삶 중심으로 방향을 옮겨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성의 활용 못지않게
감성의 활용과 통제가 중요시 되는 시대입니다.
감성이 올바르게 작동하게 하는 시스템은
동양적 가치관에서 더 잘 찾아질 것이라고 봅니다.
'변화'를 바탕으로 한 '동양적 역동성'이라고나 할까요?

7. 님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극단적으로 보아서
'유교적 가치관으로 무장된 엘리트주의'가
'어리석은 대중들의 민주주의'보다
훨씬 인류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미 경제분야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요?
한 사람의 천재가 수십만을 먹여살리고 있다는 그런 것.
민주주의라는 것도
인간의 탐욕에 의해 쉽게
오염될 수 있는 유토피아적 망상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 개개인이 '性卽理'의 깃발로 무장하여 깨어 있지 않는 한.

8. 미국사회는 이제 서서히 교조주의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악의 축'이라는 깃발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무기는 과학분야입니다.
그러나 뜻있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티벳 불교나
일본 한국의 선불교, 도교, 유교사상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아마 중국의 힘이 더 강력해지면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할 것입니다.
이제 미국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동양사상에 정통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서양의 많은 개념들도
동양적 사고를 통하여 더욱 명료하게 인식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는
불교의 空, 도교의 無, 유교의 理와 결합할 때 더욱 명확히 인식됩니다.

9. 서양인들이
'하나남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부르짖을 때
대개는 자기들의 아전인수식 하나님을 표방하지요.
'유교의 理'가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라고 보면
'불교의 空'이나 '도교의 無' 사상은
인간들의 아전인수식 독단을 경계하는 제어장치가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개념은
어떤 인간의 오만, 어느 특정 집단의 발호도
용납하지 않는 '순수한 善' 그 자체이며 '퇴계의 4端'과도 상통하지요.

10. 이러한 식으로 동서양 사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래2=

머릿글

얼마 전 미국의 한 학자가 말하기를 '한국인들은 아직도 미국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나는 이 미국 학자의 말이 싱가폴이나 홍콩의 시민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이나 중국도 미국 문명과 그 근원인 유럽문명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싱가폴이나 홍콩을 논외로 한 이유는 그 곳의 시민들은 이미 유럽식 사고방식으로 충분히 교육받고, 그 사회체제를 서구식으로 운용하기 때문이다.
이래 가지고야 미국인들이나 유럽인들과 정치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거나 경제적인 문제를 이야기할 때 서로 통할 리가 없다. 실제로 나는 미국인들이나 영국인들과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사고를 이해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보냈다.
먼 아메리카 대륙에서 이 한반도까지 뻗칠 수 있는 미국의 힘은 무엇인가?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민 가는 미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중국도, 소련도 어쩌지 못하고, 기세 등등하던 일본 제국도 대적하다가 망해 버린 미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나는 이런 문제를 늘 지니고 이 땅에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서양의 한 철학자를 알게 되고 그의 글 거의 모두를 읽고 서양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글에 나오는 인용문은 이미 내가 창작과 비평의 게시판에 올린 '도덕경에 대한 일고 一考'에 인용된 것과 중복되는 것도 있다. 내 글의 완성도와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중복 인용으로 독자들께서 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1. 유럽문명의 근원

일본에서 '철학의 천황(哲學の天皇)'이라고 불리던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하바드와 동경대학에서 철학 교수를 지낼 정도로 유명하고, 우리 나라의 내노라 하는 철학자 김용옥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고 실토할 정도로 박학한 사람으로 이름이 나있다. 김용옥이 만나서 대화한 마루야마 마사오는 김용옥의 묘사에의 의하면 헤겔주의자이다. 그 엉터리없는 철학자 헤겔의 말을 믿는 사람이다.
아무튼 마루야마 마사오는 유럽 문명의 근원을 헤브라이즘, 즉 유태 문명과 중세 스콜라 철학으로 보는 반면, 버트런드 러셀은 아테네 문명을 유럽 문명의 근간으로 본다:

지금 현대 철학을 지배하는 거의 모든 假說은 처음에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생각되었다; 그들의 추상적 문제에서의 풍부한 창조력은 아무리 칭찬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 버트런드 러셀, '서양 철학사' -

너무나 큰 시각 차이이다. 그러나 버트런드 러셀이 옳다.

2. 동양문명의 진단

마루야마 마사오의 말 중에서 '동양은 어떤 의미에서 픽션일세... 동양이 서양을 따라 갈려면 장구한 세월이 걸릴걸세'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에 긴장하고 그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열등하다는 말을 듣고 발끈하는 행위는 감정이다. 그리고 결코 감정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동양은 픽션'이다. 다시 말해서 모래 위에 쌓은 성이다라는 의미이다. 언제나 쉽게 무너지는 허황한 문명이다라는 뜻이다. 얼마나 우리에게는 심각한 말인가, 동양의 정치, 문화, 사회, 경제 모든 분야가 모래 위에 건설한 가짜라니?
니체는 유럽과 아시아를 이렇게 표현한다:

유럽은 일관되고, 비판적인 사색의 학교를 경험했다; 아시아는 여전히 진실과 시詩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모르고, 아시아의 신념이 개인적인 관찰과 조직적인 사고로부터 나오는지 환상으로부터 나오는지 깨닫지 못한다.
- 니체, '혼합된 의견과 격언' -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는 많은 동양인들. 그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탐미적인 환상에 빠진다. 동아리를 만들어 술친구가 되고, 기생을 끼고 자연을 노래한다. 자연과 나는 하나라는 환상 속에서 이태백은 술에 취해 시를 읊다가 호수에 빠져 죽는다.
어찌 자연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러나 동양인은 그 자연에 빠져 죽는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사쿠라 꽃 밑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 칼을 휘두른다. 지금은 새로운 세대에 의하여 서구식 개인주의 생활로 바뀌고 있지만, 내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만해도 한국인은 근무가 끝나면 당연히 한잔하면서 너는 나이고, 나는 네가 되었다. 결국 혼자 감당해야 하는 각자의 인생이고, 삶인데도 말이다.
삶은 각자의 몫이다. C. P. 스노우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외롭고 홀로 죽는다:

우리 각자는 외롭다: 때때로 우리는 사랑이나 애정 또는 아마도 창조적 순간을 통하여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지만, 그 승리도 길가가 암울할 때 우리 스스로 만드는 빛무리이다: 우리 각자는 홀로 죽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을 고대 아테네의 민주지도자 페리클레스와 버트런드 러셀의 말로 들어보자:

우리는 환상에 빠지지 않고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지성을 향상시키려고 애를 쓰지만 우리의 의지를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 페리클레스 -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완전히 깨어 있는 반면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기만 하는 사람은 꿈을 꾸고 있다. 후자 後者는 의견을 가지고 있고; 전자前者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 갑작스런 통찰로 보이는 것은 기만적일 수 있고, 멋진 도취가 지나면 심각하게 시험되어야 한다.

동양 사람들의 정서는 이성적이라기보다는 정서적이다. '정서적'이라는 말은 '감정적'이라는 말과 같다. 정서적인 마음은 과학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다. 정서적인 마음은 예술 세계와 가깝다. 그리고 정서적인 마음이 지나치면 나와 너, 자연과 나가 하나라는 정신병적 환상에 빠진다.
개인이 지닌 유전자와 같은 사람을 찾으려면 수십만의 인간 중에서 한 명을 만날까 말까 하고, 설사 유전자가 동일한 사람이라 하여도 자라난 환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이 세상에서 너와 내가 같을 수 있는가?
자연과 인간이 조화만을 이루고 살아야 한다면, 다시 말해서 자연을 개척하고 심지어 바꾸려는 노력이 없다면 지금까지 인간이 이룩한 문명은 헛수고가 아닌가? 니체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해서 행복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엄격한 방법으로 발견된 작은 겸손한 진실이 고급문화의 특징이다'라고 주장한다:

엄격한 방법으로 발견된 작은 겸손한 진실을, 철학적 시대와 철학적 인간에 의하여 전해진 오류보다 높이 평가하는 것이 고급 문화의 특징이지만, 그 오류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해서 행복하게 만든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주장은 서양의 근본적 사상이 아니다. 동양의 근본적 사상이다. 물론 인간은 자연 속에서 태어나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지만, 자연을 인간에게 맞추어 개발한다. 그러므로 만약 인간이 자연에 순응만 하고 살아왔다면 인류의 문명은 없다. 그냥 원시인들처럼 살면 된다.
여기에서 적자생존이라는 다윈의 냉혹한 생존논리는 그 동물적 성격 때문에 설득력을 잃게 된다.
무엇이 생존을 위한 적당함인가? 서로 싸우고 잡아먹는 인간 투쟁의 승리가 생존의 필수요건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의 진보는 인간의 협동으로써 이룩되어 왔다. 원시인들이 큰 동물을 사냥하는 과정에서 서로 돕지 않고 싸움질만 하였다면 이미 지구상에서 멸종해버린 동물들처럼 인간이라는 종 또한 오래 전에 멸종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근세에 일어난 1, 2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문명을 파괴했는지 잘 안다. 그리고 오늘날 인간이 만들어 낸 대량학살 무기의 성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요즈음 지나친 환경 파괴를 걱정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환경은 파괴되었고, 인류가 지구상에 태어난 이래 환경이 자연 그대로였던 적은 없다. 인간이 있기 전부터 빙하기는 있었으며, 거대한 산불과 지진도 일어나서 자연은 파괴되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에 의하여 추방되었다는 성경의 전설은 인간에게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지식이, 다시 말해서 이성理性이 생겼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에덴 동산, 즉 순수한 자연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자연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야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전염병이 만연하고, 홍수가 넘치고, 기근이 대량 아사 내지는 전쟁을 불러오고, 태풍이 인간을 휩쓸어 가는 '잔인한'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연 상태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니체와 미국의 정신과 의사 스콧 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에 따라 살고' 살고 싶다고? 오 고상한 스토아 철학자들이여, 거짓말! 터무니없이 낭비적이고, 무관심하며, 목적도 없고, 의지도 없이, 자비심과 정의도 없고, 생산적인가 하면 황폐하고 불안한 자연을 생각해 보라. 자연의 무관심한 힘을 생각해 보라. 어찌 그런 무관심한 힘에 따라 살 수 있는가? 산다는 것은 이 자연과 달라지기를 원하는 게 아닌가? 삶은 평가며, 선호며, 불의한 것이며, 제한되는 것이며, 달라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설사 당신들이 촉구하는 '자연에 따라 살라'는 게 실제로는 '생명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해도 어찌 내가 한 말과 다르게 살 수 있는가?
- 니체, '선악을 넘어' -


에덴 동산 이야기는 물론 신화이다. 그러나 다른 신화들처럼 그것은 사실을 표현한다. 에덴 동산의 신화가 전하는 많은 사실 중에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의식 속으로 진화했는지가 있다. 우리가 선악을 아는 나무로부터 사과를 먹었을 때, 의식을 갖게 되고, 의식을 갖자, 즉각 우리는 자신을 의식하게 되었다.
- 스콧 펙, '가지 않은 길 후편' -

우리가 천국으로부터 추방되었을 때 우리는 영원히 추방되었다. 우리는 에덴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러분이 그 이야기를 기억한다면 길은 천사와 불타는 칼에 의하여 차단되어 있다. 우리는 돌아 갈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따름이다.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 유아기로 돌아가려고 애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자궁이나 유아기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성장해야 한다. 우리는 메마르고 황량한 땅을 지나 점점 더 깊은 의식의 수준으로 고통스럽게 가면서, 삶의 사막을 통과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따름이다. 마약 남용을 포함하여, 많은 인간의 병이 에덴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 스콧 펙, 상게서 -

우리는 사막을 통과하여 앞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그 여행은 어렵고 의식은 자주 고통스럽다. 노망기는 생물학적 병일 뿐 아니라, 심리적 성장을 일생의 형태로 시작하는 어떤 사람에 의하여서도 예방될 수 있는 심리적 질병인, 성장하기를 거부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일찍이 자기들 삶에서 배우기와 성장하기를 중단하고 변화하기를 중단하고 고착된 사람들은 때로는 그들의 “두 번째 아동기”라고 불리는 것 속으로 타락한다. 그들은 투덜거리고 고압적이며 자기 중심적이 된다. 우리, 정신과 의사들은 성인들같이 보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는 성인의 옷을 입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정서적으로는 아이들이라는 것을 안다.
- 스콧 펙, 상게서 -

바지에 배설하거나 치솔질을 하지 않는 것 또한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우리는 부자연스러움이 제2의 천성이 될 때까지, 부자연스러움을 배운다. 인간 특성의 또 다른 면은 부자연스러운 짓을 하고, 초월해서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본성을 바꾸는 것이다.
- 스콧 펙, '가지 않은 길' -

그러나 동양 사람들은 자연과 똑 같이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고 옛날부터 주장했다. 그 대표적인 서적이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동양인들은 자연처럼 살면 마치 영원 불멸할 듯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식을 찾고, 야생 동물의 고기를 먹으며, 신비한 약초를 구한다.
두말할 것 없이 우리는 자연에서 자라는 모든 생명체의 효능을 아직 모른다. 어떤 약초와 동물이 암을 치료하고, 당뇨병을 고치며, 인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성적인 서양 사람들이 게놈의 지도를 완성할 때, 동양인들이 자연의 신비를 찾아 헤매는 것은 심한 정신적 차이를 드러낸다.
나는 동양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연과 동화하려는 마음을 정신적 미개 상태로 볼 수밖에 없다. 불가능한 일을 추구하고, 올바르지 못한 길을 가는 비이성적 행동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은 인간이 여태까지 이룩한 문명을 거부하는 몸짓이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일을 부정하고 내팽개치는 무책임한 행위이다.
이러한 행태는 문명이 가지는 결점 때문에 발생하며, 아무도 미래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생기는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완벽한 문명이란 없다. 인간이 만든 문명 모두가 불안정하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 놓은 문명을 고스란히 무너뜨리지 못할 바에야, 문명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개선되고 전진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문명이 시행착오를 통하여 전개된다는 사실은 우리의 문명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나타난 우연스런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나 근세에 이르러 히틀러 레닌, 스탈린 따위의 많은 미치광이들이 인간이 이룩한 문명을 휩쓸어 버리고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려다 결국 실패하고 만다.
모택동은 홍위병으로 중국 대륙에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겠다고 나섰다가 실패한다.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원시 시대부터 인간들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문명을 이룩하였지 기존문명을 없애고 새로 지으려는 미치광이 짓으로 문명을 이룩한 적은 없다. 그러한 인간의 시행 착오를 종교에서는 원죄原罪나 업業(karma)라고 부른다.
인간 문명의 시행 착오를 피하거나 줄이는 방식으로 인류가 만들어 낸 정치제도로서 가장 뛰어난 것이 민주주의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짓는 중대한 사안들이 소수 인간들이나, 특정 집단의 이해로 독단적으로 결정되는 일을 피할 수 있는 정치제도는 민주주의 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가장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가장 훌륭한 사회적 결정을 도출해낼 수 있는 최고의 정치제도이고, 따라서 사회의 진보를 이룩할 수 유일한 정치제도이다.
그러나 동양인들이 얼마나 민주주의의 장점을 이해하고, 개인의 자유를 위하여 희생을 각오하고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한국에서만 해도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확고해지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 국민들의 얼마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이해하고 있는지 나는 의아해 한다.
인간이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면, 문명은 개선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은 아직 미숙 상태로 남게 된다. 이러한 정신 상태, 다시 말해서 진보를 거부하는 인간의 정신 상태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많은 인간들에게 존재한다. 스콧 펙은 이 정신 상태를 일종의 정신병으로 간주하고, 죤 오닐은 실패한 지도자 오디세이를 설명한다:

지도자의 개인적인 혁신에 대한 그의 저서 성공의 모순에서, 죤 오닐은 어떻게 지도자가 자기 일생에서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지를 묘사하기 위하여 두 번째 곡선모형을 사용한다. 그는 한가지 필수 요소는 자신의 과거를 버리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람이 너무 감정적으로 지나간 것에 매달리면 어떤 정도로도 변화하기가 어렵다. 그는 한 때 뛰어났던 돌아다니며 공격하기에 매달려서 트로이 전쟁에서 자기 왕국인 이타카으로 돌아와서 다스리는 책임 맡기를 주저하여, 20년을 보냈던 젊은 군인 사령관의 보기로 오디세이를 인용한다. 그가 고국에 돌아왔을 때, 누더기를 걸친 실패한 사령관이었고, 그의 왕국은 엉망이었다. 이것이 성장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 찰스 핸디, '모순의 시대' -

그러므로 동양 문명이 자연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우리 모두는 정신병에 걸린 것이다. 심각한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지 못하는 비이성적 주장의 본보기가 인도에서 시작된 윤회 사상이다. 이 윤회 사상은 인간들을 순치시키는데는 매우 효과적일지는 모르지만 과학적인 주장은 아니다. 라다 크리슈난이 쓴 '인도 철학사'에 의하면 윤회 사상은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새싹이 솟는 것을 보고 인간이 만든 것이다.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씨앗이 떨어져서 다시 싹이 트는 일을 보고 인간은 죽어서 환생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더구나 전생에 지은 죄에 따라 동물로 다시 태어난다고 겁을 주는 방식은 매우 유치하기까지 하다. 이런 유치한 윤회 사상에 대하여 지각 있는 사람들은 사후死後에는 지옥도 없고 천당도 없다고 설명하며, 그런 설명은 많은 사람들의 옹호를 받는다.
윤회 사상이 발전하면 죽음과 삶이 같다는 주장까지 나와서, 세상에서 유명한 성자聖者나 철학자도 심심찮게 그런 주장을 한다. 이런 삶과 죽음을 동일시하는 헛소리는 특히 감수성이 강한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젊은이들이 자살을 찬미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매우 심한 염세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어 이 세상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자신을 학대하는 비극을 낳는다.
정작 삶과 죽음이 같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일도 드물거니와 그 알량한 주장으로 명성이 드러나 자신의 위상을 즐기고 살아간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알렉산더 대왕을 따라 인도에 왔던 백인들이 자기들끼리 결혼하거나 원주민들과 결혼하면서 피정복자인 원주민을 하급 인간으로 취급한 데서 생겨났다고 라다 크리슈난은 설명한다. 역시 비과학적인 카스트 제도이지만 이 두 가지 사상이 인도의 과학 발달을 막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신화나 전설을 포함한 인간의 '묘사적 언어 기능(descriptive function of language)'은 이성적, 즉 과학적 비판을 거치지 않으면 설득력을 잃는다. 이성적 비판을 거쳐서 모든 과학 이론이 발달한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화나 전설은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신화나 전설에 비판 없이 몰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비현실적이다.
동양인들이 신화나 전설에 몰두하는 것은 그 신화나 전설들이 권위자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전달되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권위적인 사회에서, 권위자에 의하여. 인도에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인도인들이 피부가 흰 코카서스 인들의 권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수 천년을 가부장적 가족 제도에서 살아온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들도 감히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전하는 전설이나 신화를 비판하지 못한다. 설사 학교라 하여도 스승의 설명에 비판을 가하는 행위는 그 사회에서의 추방을 의미한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양의 국공립학교는 지배자인 절대 군주의 신하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따라서 절대 군주의 통치 이념을 거스르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 행위는 반란이며 잔혹한 형벌이 주어진다. 결과적으로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가 탄생할 수 없다.
동양의 문명은 불교와 유교가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문명이다. 인도의 종교에 대한 스콧 펙의 비판은 이렇다:

신비주의는 본질적으로 현실은 하나다라는 믿음이다. 신비주의자 중에서 가장 본질주의자들은 모두가 경계로 서로 분리된 많은 개별적인 물체 - 별, 혹성, 나무, 새, 집 우리 자신 - 를 포함하는 우주에 대한 우리의 보통 지각이 그릇된 지각인 망상이라고 믿는다. 우리들 대부분이 사실로 잘못 믿는 이 집단적 오해인 망상의 세계에게, 힌두교도와 불교도들은 '마야'라는 말을 적용한다. 그들과 다른 신비주의자들은 진짜 현실은 자아 경계를 버리고 하나임을 경험함으로써만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자신을 어떤 방식, 형태 또는 모양으로 우주의 나머지와 분리되어 구별불가능한 개별적인 물체로서 계속해서 본다면 우주의 통합을 진실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힌두교도와 불교도는 그러므로, 자주 성인成人들은 알지 못하는 반면, 자아 경계발달 전의 유아는 현실을 안다고 주장한다. 어떤 교도는 심지어 현실이 하나임에 대한 계몽이나 지식을 향한 길은 우리가 뒤로 돌아가거나 우리 자신을 유아처럼 만들 것을 요구한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어른의 책임을 지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어떤 청년과 젊은 성인成人에게는 위험스럽게 유혹적인 원칙이 될 수 있고, 그 책임은 그들의 능력을 넘어 놀랍고 압도적이며 강제적이다. 그러나, 이 상상에 의하여 행동함으로써 성인聖人 보다는 정신분열증이 생겨난다.
- 스콧 펙, '가지 않은 길' -

정치에 가장 큰 관심을 갖는 중국에서 시작된 유교는 설령 그 목적이 폭압적인 '패도'를 없애고 백성을 위한 소위 '왕도'를 건설하는 것이라 하여도 '왕도'란 지배자에게 설득하여 이루질 수 있는 정치적 목적이 아니며, 유교가 그런 정치적 목적을 갖는 한 과학 발전을 위한 철학이 될 수 없다. 유교주의자 중에서 가장 진보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맹자도 군주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계를 지닌다.
한나라의 무제는 경학을 들으라는 권유에 '나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경학 따위는 나에게 필요 없다'라고 말했다. 소위 춘추전국시대라는 전쟁이 일상사였던 시대에, 더구나 적대적 관계에서만 생존을 추구하던 지배자의 세상에서 道을 말하고, 王道와 仁義禮智를 주장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이야기였다.
춘추전국시대란 순수한 이성이 가치 없는, 폭력과 음모의 시대이다. 이러한 폭력적 지배자를 전제로 한 사회구조가 근세까지 계속되고, 그러한 지배를 인정하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이 사회적으로 계승되는 현대까지, 동양에는 전근대성이 남아있다.
백 보를 양보하여 유교는 교육을 중시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여도, 그 강압적이고 형식치중의 유교식 교육이 인간의 본능적인 탐구 정신을 말살한다고 나는 주장하겠다. 더구나 유교의 교육이라는 게 군주의 신하를 만드는 목적을 지니고 있음에 다다르면 나는 유교의 교육이란 노예를 만드는 세뇌 교육이라고 주장하겠다.
그런 유교적 교육이 펼쳐지는 사회에서 학교의 우등생은 사회의 열등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회는 늘 변하고, 새로운 문물이 순식간에 밀려오는 사회에서 윗사람 잘 떠받드는 예절 따위나 강조하는 학교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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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글날 국경일 제정은 불가능할 것 같다. - hanikoo(hanikoo@naver.com) ┼
│ 주5일 근무제가 금융권으로 부터 시작하여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국경일을 줄여서 공휴일을 줄이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 한글날 국경일 제정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이제 한글학회 누리집의 자막으로 뜨는 캐치프레이즈도 다른 것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 보다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목표를 설정할 단계에 와 있다고 봅니다.

│ 한글전용, 한자교육 등의 TV토론을 과거부터 보아 왔습니다만 저의 기억으로는 한번도 어성을 높히지 않고, 얼굴을 불키지 않고 토론을 끝낸적이 없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 왜 그럴가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 토론 과제가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갖는 예민한 과제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민한 과제라 해서 토론 참가자들이 어성을 높히고 핏대를 세우며 상대방 주장을 묵살하려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지요.

│ 반대로 해석하면 한글학자나 한문을 전공하신 분들은 관대하지 못하고 편협하여 합리적이고 신사적인 토론문화를 만들수 없는 분들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 한글사랑방도 보면 토론논조에 극단적이고 인신공격적인 표현을 하고 욕설도 서슴치 않고 사용하는 분들이 보입니다. 분명이 잘 못된 것이고 시정되어야 합니다.

│ 한글학회를 비롯하여 한글을 사랑하는 사람 모두 시야를 넓히고 마음을 비워서 반성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한글은 이제 많은 외국인 배우고 있으며, 각 나라의 나랏말 과 글도 우열을 가리는 세계적인 경쟁시대로 진입하였습니다.

│ 한글학회는 한글사랑방의 토론 쟁점에 대하여 거의 의견을 말하지 않는 방관자적 태도를 취하고 있어 불만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지요?

│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쟁점에 대하여는 의견을 개진하거나 참고자료를 알려주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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