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없애야 말 된다
(345) 주체적 1 : 주체적으로 인식하지
.. 첫째, 구조변동의 과정을 주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단순한 ‘적응’의 압력 앞에서 모종의 ‘두려움’에 휩싸일 때 .. 《강수돌-노동의 희망》(이후,2001) 216쪽
교수님들이 쓰는 책은 웬만해서는 안 읽으려 합니다. 뻔하고 쉬운 이야기를 너무 어려운 말에 가두어 놓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말이라는 쇠창살에 갇힌 좋은 이야기들이 불쌍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구조변동의 과정”은 무엇이고, “단순한 ‘적응’의 압력 앞에서 모종의 ‘두려움’에 휩싸일 때”는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사회가 바뀌어 가는 흐름”을, “세상이 달라지는 흐름”을, 그리고 “그저 ‘따라야 한다’고 억눌리는 가운데 어떤 ‘두려움’에 휩싸일 때”를 말할 수 없었을까 궁금합니다. 말을 말대로 풀어놓지 못한 채 자꾸만 감옥에 가두거나 옭매어 놓는다면, 우리들은 서로서로 무슨 생각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 주체적(主體的) : 어떤 일을 실천하는 데 자유롭고 자주적인 성질이 있는
│ - 한국사의 주체적 전개 / 인간은 저마다 주체적 존재로서 /
│ 서양 철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다
├ 주체(主體)
│ (1) 어떤 단체나 물건의 주가 되는 부분
│ - 검찰 내부에서는 그 사건의 수사 주체를 놓고 신경전이 벌어졌다 /
│ 국가의 주체는 국민이다.
│ (2) 사물의 작용이나 어떤 행동의 주가 되는 것
│ - 역사의 주체 / 가계는 중요한 경제 활동의 주체 가운데 하나이다
│
├ 주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 자기 나름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 슬기롭게 살피지 못하고
└ …
말이 홀가분하지 못한 까닭이라면, 먼저 생각이 홀가분하지 못한 탓입니다. 생각이 홀가분하지 못한 까닭이라면, 우리 몸이 어디엔가 매여 있는 탓입니다. 권력에 매이든 강단에 매이든 돈에 매이든, 어디에든 매여 있기에 우리 몸은 쇠사슬에 친친 감겨 있는 셈이고, 쇠사슬에 친친 감겨 있는 몸에서 홀가분하며 너른 생각이 용솟음치듯 흘러나오기는 어렵습니다.
지난날이나 오늘날이나, 우리 나라 아이들은 대학입시 굴레를 뒤집어쓰면서 그 풋풋하고 싱싱한 젊은을 잿빛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 생각을 키우고 자기 넋을 가꾸며 자기 꿈을 일구어 가지 못하게끔 눌려 있습니다. 밟혀 있습니다. 죽어 지냅니다.
아이들 말이 자꾸 아파하고 있다면, 아이들 말이 자꾸 ‘외계말’이라 하는 말처럼 뒤틀리고 있다면, 아이들이 자기 꿈과 생각을 스스럼없이 펼치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바로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제도권 입시교육에 훌륭히(?) 가두고 길들인 보람입니다. 닫힌 학교, 갇힌 학교, 막힌 학교인데, 아이들한테서 열린 생각, 트인 마음, 깨인 슬기를 바랄 수 없는 노릇입니다.
┌ 서양 철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다 → 서양 철학을 우리 나름대로 받아들이다
├ 인간은 저마다 주체적 존재로서 → 사람은 저마다 자기 줏대가 있어
└ 한국사의 주체적 전개 → 한국 역사를 우리 스스로 읽어내기
생각해 보면, 우리 스스로 우리 말로 우리 땅에서 우리 생각(철학/사상)과 삶을 가꾸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무리가 있습니다. 헌법은 있어도 국가보안법이 그 위에 올라타고 있습니다. 또한 ‘법을 밟고 있는’ 이와 같은 몹쓸 무리에 기대어 떡고물 얻어먹는 사람이 퍽 많습니다. 허울은 그럴싸한 ‘자유민주주의’이지만, 미국과 맺는 무역협정은 ‘자유무역’협정이라고 하지만, ‘자유’라는 말이 참된 자유로움을 뜻하는 자리에 쓰이지 않습니다. 껍데기를 씌워서 거짓이 되어 버린 자유요, 참된 모습이 감춰진 자유요, 오히려 우리들을 꽁꽁 묶거나 짓누르고 있는 자유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외쳐지는 ‘자유통일’과 ‘자유수호’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사회가 사회다움을 잃는 자리에서 말이 말다움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정치가 정치다움에서 벗어나 있는 곳에서 글이 글다움을 지킬 수 없습니다. 경제도 문화도 교육도 예술도 경제다움과 문화다움과 교육다움과 예술다움에서 한참 멀어져 있습니다. 동떨어져 있습니다.
참됨을 찾고 참길을 가야 합니다. 참됨을 찾아야 말이 참되게 새로워집니다. 참길을 가야 글이 참되게 다시 태어납니다.
오순도순 즐겁게 가꿀 우리 말은, 거짓을 떨치고 참을 찾는 자리에서 가꿀 수 있습니다. 싱글벙글 살가이 나눌 우리 글은, 거짓을 씻어내고 참을 일으키는 터전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4338.10.29.흙.처음 씀/4341.11.7.쇠.고쳐씀.ㅎㄲㅅㄱ)
============================
'-적' 없애야 말 된다
(1319) 주체적 2 : 주체적이라 해야 하나
.. “솔직히 우리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얘네는 우리랑 좀 많이 다른 것 같아요. 더 주체적이라 해야 하나.” .. 《박남정-초딩, 자전거길을 만들다》(소나무,2008) 27쪽
‘솔직(率)히’는 ‘가만히 보면’이나 ‘생각해 보면’으로 다듬습니다. “그런 점(點)에서”는 “그런 대목에서”로 손보고, “다른 것 같아요”는 “다른 듯해요”로 손봅니다.
┌ 주체적이라 해야 하나
│
│→ 자기 스스로 한다고 해야 하나
│→ 자기 길을 스스로 찾는다고 해야 하나
│→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한다고 해야 하나
└ …
북녘에서는 ‘주체사상’이 있어서, 어떤 일이든 북녘땅에서 북녘사람 스스로 일구어 내야 한다는 흐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처럼 북녘 사회가 어수선하고 먹고살기 힘든 때에도 ‘주체’를 지킬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더군다나 우리들 남녘에서는 북녘 ‘주체사상’을 나쁘게만 여기고 있습니다. 생각과 사회 틀거리가 다른 대목은 서로 다르다고 받아들이면서, 잘하는 대목은 북돋우고 아쉬운 대목은 고치면 좋으련만, 서로서로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생채기가 깊어서 좀처럼 하나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 더 야무지다고 해야 하나
├ 더 생각이 깊다고 해야 하나
├ 더 몸과 마음이 튼튼하다고 해야 하나
├ 더 슬기롭다고 해야 하나
├ 더 씩씩하다고 해야 하나
└ …
저는 북녘땅을 밟아 보지 못해 북녘사람이 어찌 지내고 북녘 나라가 어떠한지 잘 모릅니다. 다만 ‘주체’라는 말을 쓰는 대목은 눈여겨봅니다. 비록 한자말 ‘主體’이기는 하나, 우리 말로 치면 ‘줏대 있게’ 살겠다는, ‘제힘으로’ 헤쳐나가겠다는, ‘스스로’ 길을 열겠다는 마음을 이렇게 나타내지 않았는가 헤아리곤 합니다.
줏대 있게 살아가려는 사람한테는 단단한 마음과 튼튼한 몸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단단하게 여미어지지 않거나 몸이 튼튼하게 바로서지 않고서는 줏대를 지키기 어려워요.
제힘으로 살아가려는 사람한테는 슬기로운 마음을 가꾸는 한편,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씩씩하게 세상을 부대끼겠노라 하는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길을 열려는 사람한테는 깊이 생각하고 널리 돌아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도 넋도 몸가짐도 매무새도 오롯이 추스르면서 야무지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내 삶을 사니까 내 나름대로 꿋꿋하게 살아갑니다. 내 길을 걸으니까 내 깜냥껏 다부지게 걸어갑니다. 내 사람을 만나니까 내 사랑을 듬뿍 실어서 어깨동무를 합니다. 내 믿음을 지키니까 내 비손을 내 마음그릇에 걸맞게 빌면서 몸을 다스립니다. 내 말을 하고 내 글을 쓰니까, 내 얼과 넋을 고이 보듬으면서 비틀리거나 어그러지지 않도록, 뒤틀리거나 어수룩하지 않도록, 챙기고 익히고 곱씹고 되짚습니다.
┌ 우리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잖아요 ← 비주체적
└ 우리는 어른들이 시키지 않아도 하잖아요 ← 주체적
말을 살리자면 삶을 살려야 합니다. 글을 살리자면 마음을 살려야 합니다. 말을 살리고픈 이라면 우리 세상을 살리는 데에 힘을 보탭니다. 글을 살리고픈 이라면 우리 터전을 아름다이 돌보는 데에 마음을 쏟습니다.
말을 살리고 싶으니 내 둘레 이웃 삶을 함께 아우르면서 내 삶을 고이 돌봅니다. 글을 살리고 싶으니 뭇 목숨붙이가 제 터에서 제 뿌리를 내릴 수 있게끔 자연사랑을 펼쳐 나갑니다.
말을 아끼는 마음이기에 밥 한 그릇 또한 아끼면서 땀흘리는 사람들 눈물방울을 곱씹습니다. 글을 껴안는 마음이기에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땅 한 번 내려다보면서 우리가 발디딘 땅과 이고 있는 하늘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4341.11.7.쇠.ㅎㄲㅅ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