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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한울소리 14 (피묻은 유네스코 문화유산)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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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한울소리 14 (피묻은 유네스코 문화유산)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살다가 죽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진시황이 그랬고 레로황제가 그랬을까?

더구나 여자로 태어나서 수 많은 사내를 갈아치우며 자기 말 한마디면 그대로 되는 천하의 영웅이 있었으니 그 이름을 서태후.

서양 물질문명에 찌든 사람들은 그 진시황이나 서태후가 부러울 것이다.



흔히들 우리에게는 단군의 유적 이라곤 겨우 마니산 돌무더기뿐이라 한탄한다

중국서 처럼 거대한 만리장성이나 화려한 이화원 같은 문화유적이 없다한다.

그러나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흉노족(한민족)을 막는다는 구실로 쌓았으나 결국 진라라가 망한것은 그 진시황이 말리장성을 쌓느라고 백성의 피와 땀을 수탈한 학정과 그 막내 호해가 간신들과 짜고 형의 왕위를 찬탈하고는 그 형제 공주 일가 친척을 다 처참하게 죽여 민심이 이반된 원인 이라 할 수 있다.



거대한 호수에 화려한 궁전으로 지어진 이화원은 서태후의 여름 별장인데 호수가 자연 호수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판 것이라 하니 그것을 팔 때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피땀을 흘렸겠는가?









북경 근처 만리장성인 모전욕의 설경. 진시황은 기마민족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이를 만리장성 안에 있는 민족만이 중국인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서태후는 동치제(同治帝:1861~75 재위)의 어머니이자 광서제(光緖帝:1875~1908 재위)의 양어머니로서 청 제국을 거의 반세기 동안 지배했다.

그녀는 함풍제의 서열이 낮은 후궁이었는데 야망과 요염을 무기로 1856년 황제의 유일한 아들 재순(載淳)을 낳았다.

황제가 죽었는데 이는 정권욕에 눈이 먼 서태후의 독살이나 궁녀들에 의한 색살(色殺)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황제는 애초 어떨 결에 서태후를 드린 후로는 그 간악함에 무척 경계했다. 그의 정실인 동태후에게 밀지를 내려 아무리 서태후가 통치권을 요구해도 들어주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서태후는 교묘한 방법으로 기어이 그 밀지를 빼앗아 태워 버리고 동태후조차 독살 했다 한다.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가 성년이 된 이후인 1873년 섭정은 끝났지만 서태후는 계속해서 국사를 장악하고 싶어 했다. 심지어는 그녀가 젊은 황제에게 무절제한 성생활을 하도록 유도하여 황제의 서거를 앞당기게 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군대의 힘을 빌려 제위계승의 원칙을 무시하고 3세밖에 되지 않은 조카를 양자로 삼아 계속 정권을 장악했다.

3년 후 그녀는 그 왕마저 제거하고 그와 그 대신들이 추진하던 개혁정책의 대부분을 폐기시켰다. 1889년 서태후는 명목상 자신의 권력을 정부에 넘겨주고 은퇴하여, 베이징[北京] 북서쪽에 재건한 호화로운 이허위안[?和園]을 막대한 돈과 백성들의 피땀으로 파게 하여 거기에 기거했는데 그때 젊고 미남인 신하들을 불러들였는데 그때 처음으로 콘돔을 사용했다는 소문이다. 즉 양의 창자로 만든 콤돔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신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지고 다시 젊은 미남 신하를 선택... 또 선택...



서태후가 이와 같이 젊은 사내를 갈아치우고 말썽이 많아지고 중국이 청일전쟁(1894~95)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지 3년이 지난 1898년 젊은 광서제가 개혁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중국 정부를 쇄신· 근대화하고 부패를 제거하기 위한 급진적인 계획을 추진하자, 서태후를 받드는 수구파 관료들이 서태후 주위에 집결하여 군사력을 동원한 일격을 가했다.



새로운 개혁정책은 원점으로 돌아갔으며, 새로운 황제는 자신의 궁전에 연금되었고 서태후가 다시 섭정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중국이 평화롭게 변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무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듬해 서태후는 반외세적(反外勢的) 성격의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을 조장한 관료들을 지원했다. 1900년 의화단운동은 최고조에 달하여 수백 명의 외국인이 살해되었고, 베이징에 주재하던 외국공사관들이 포위되었다. 그러나 외국 연합군이 곧 베이징을 장악함에 따라 서태후는 베이징을 떠나 치욕스러운 강화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광서제는 아직 정부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1902년 베이징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1898년에 자신이 무산시켰던 독재정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죽기 전날 광서제의 죽음이 공표되었는데, 그녀의 명에 따라 독살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와 같이 한 여인의 권력욕에 의한 중국역사는 차츰 기울어 저 갔고 많은 백성이 희생 되었으니 이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그녀는 백성은 그렇게 많이 죽었어도 자신이 늙어 죽어 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서러웠을 것인가?

그러나 이런 그녀의 무소불위의 권력과 막대한 돈은 서양의 물질문명을 숭상하는 현대인들은 부러워 할지도 모른다.



즉 자연 섭리에 의해 사람를 아끼고 인본주의를 최우선으로 하는 하느님 말씀 [진본 천부경] 하나 둘 셋 ...열 이론과 그 유적지 마니산 돌 무더기는 알아 주는 사람이 없어도 잔악하게 인간을 죽여 얻은 피묻은 유적만이 현재 그럴 듯 하니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되고 관광객이 들끓는다.





























































































































































사진은 운봉 컴사랑 중에서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진본천부경] 하나 둘 셋 ...열을 떼어놓고는 한시도 살 수 없음으로 이 [천부경 한울 소리]는 자주 보내질 것인데 이 글은 독자들에 의해 여러 카페에 돌아다닐 것이고 단군 상의 목을 치거나 우리 하느님 소리만 나와도 싫어하는 카페가 있을 것이니 계속 읽거나,누구에게 하고 싶은 분은 천부경.net 치고 들어와 준회원만 되어도 전체 메일을 받아보게 되고 글쓴이 카페 [천부경 한울소리]에는 전에 써진글들이 모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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